포항 스틸러스

 




'''포항 스틸러스'''
'''Pohang Steelers'''
'''정식 명칭'''
포항 스틸러스 축구단
'''영문 명칭'''
Football Club Pohang Steelers
'''법인명'''
㈜포항스틸러스
'''애칭'''
'''강철전사'''
'''창단 연도'''
1973년 4월 1일(51주년)
'''창립자'''
박태준[1]
'''구단 형태'''
기업구단[2]
'''소속 리그'''

'''연고지'''
경상북도 포항시[3]
'''홈 경기장'''
대구시민운동장 (1987)[4]
포항종합운동장#s-3.1 (1988~1990[5], 2003[6], 2013[7])
'''포항스틸야드''' (1990~ / 15,170석)
광양축구전용구장 (1993~1994)[8]
'''구단명 변천'''
포항제철 축구단 (1973~1982)
포항제철 돌핀스 (1983~1984)
포항제철 아톰즈 (1985~1994)
포항 아톰즈 (1995~1996)
'''포항 스틸러스''' (1997~)
'''라이벌'''
'''울산 현대''' - 동해안 더비
'''모기업'''

'''킷 스폰서'''
[9]
'''대표이사'''
최인석
'''감독'''
김기동
'''주장'''
오범석
'''부주장'''
강상우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10] [11]
'''팬 카페'''

'''마스코트'''

'''쇠돌이, 쇠순이'''
'''상징색'''
'''검은색''', '''빨간색'''
'''유소년 시스템'''
'''U-18'''
포항제철고등학교[12]
'''U-15'''
포항제철중학교#s-5
'''U-12'''
포항제철초등학교[13]
'''우승 기록'''
'''K리그1'''
[image][image][image][image][image]
(5회)
1986, 1988, 1992, 2007, 2013
'''FA컵'''
[image][image][image][image]
(4회)
1996, 2008, 2012, 2013
'''리그컵 '''
(2회)
1993, 2009
'''AFC 챔피언스 리그'''
[image][image][image]
(3회 / 최다 우승)[14]
1996-97, 1997-98, 2009
'''홍콩 구정컵'''
(1회)
2010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1회)
1974
'''전국실업축구연맹전'''
(5회)
1975전, 1981후, 1982, 1986후, 1988후
'''클럽 기록[15]'''
'''최다 출장'''
김광석 - 385경기
'''최다 공격포인트'''
황진성 - 105개 ,(47득점 58도움),
'''최다 득점'''
라데 - 55득점
'''최다 도움'''
황진성 - 58도움
'''최고령 출장'''
김기동 - 39세 9개월 18일 ,(2011.10.30),
'''최연소 출장'''
최문식 - 18세 2개월 19일 ,(1989.03.25),

★ ★ ★ ★ ★
'''WE ARE STEELERS'''
1. 개요
2. 역사
3. 우승 경력
3.1. 우승 상세 정보
3.2. 개인 수상
4. 유소년 시스템
5. 역대 감독
6. 코칭 스태프 명단
7. 선수 명단
8. 시즌별 일람
9. AFC 챔피언스 리그
10. 상징
10.1. 가로검빨과 시안블루
10.2. 영일만 친구
10.3. 스틸타카와 스틸러스 웨이
10.4. 포항유스, '화수분 축구'
11. 타 구단과의 관계
11.2. 서로 다른 검빨, FC 서울
11.4. 클래식 라이벌, 성남 FC
11.5. 제철가 형제, 전남 드래곤즈
11.6. 경북권의 맞수, 대구 FC
12. 유니폼
13. 엠블럼
13.1. 과거 엠블럼
13.2. 기념 엠블럼
14. 마스코트
15. 시설
15.1. 홈 경기장
15.2. 클럽하우스
16. 명예의 전당
17. 인물
18. 등번호
19. 응원단
20. 서포터즈
20.1. 응원가
21. 사건사고
22. 이야기
22.1. 전통과 인기
22.2. FA의 악연
22.3. 퐁당퐁당 홀짝 징크스
22.4. 숨겨진 골키퍼 명가
22.5. 스틸러스와 스틸야드
22.6. 블레즈(BLEDS)
23. 여담
2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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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포항시를 연고지로 둔 K리그1 소속의 프로축구단.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된 프로 축구 클럽'''[16][17] 이자 한국 축구의 레전드들의 산실. 51년의 역사와 함께 K리그1 5회 우승(1986, 1988, 1992, 2007, 2013)[18], 대한축구협회 FA컵 4회 우승(1996, 2008, 2012, 2013)[19]AFC 챔피언스 리그[20] 최다 우승(1996-97, 1997-98, 2009) 기록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의 명문이다.'''
또한 2020 시즌 기준으로 유일하게 강등 및 해체 경험이 없는 리그 원년 팀이다.[21] 그리고 한국 축구의 역사를 대변하는 최고의 명문팀이다.

2. 역사



1973년 창단 때부터 강호였으며 몇 차례 암흑기가 있기도 했으나 꼬박꼬박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정규 리그 우승 횟수는 5회'''로 7회인 전북성남, 6회인 서울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그 외 준우승과 플레이오프 탈락이 은근히 많지만, 최대 라이벌인 동해안 더비울산보다 우승 횟수가 많고 준우승 횟수가 적은 게 위안이라면 위안.
2009년에는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FIFA 클럽 월드컵에 나가 현재까지 K리그 팀 중에서는 유일하게 3위의 성적을 기록하였다.[22] 그리고 2013년에는 K리그 최초의 '''"리그 우승 + FA컵 우승"''' 더블을 달성하기도 했다.[23]
성적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선진 축구를 흡수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K리그 원년(1983년)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를 영입했고, '''한국 최초의 축구 전용구장인 포항 스틸야드'''를 건설(1990년)하여 현재까지 홈구장으로 사용[24]하고 있으며, 포철공고 축구부를 창단(1993년)하여 '''유소년 시스템을 가장 먼저 정착'''[25]시켰고, 다른 기업구단들에 비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구단을 법인화[26](1995년)했으며, '''한국 최초의 클럽하우스인 송라클럽하우스'''를 개장(2001년)하였다. 그리고 2013년에는 '''창단 40주년을 기념하며 포항 스틸러스 명예의 전당을 만들었다.'''[27]
한국축구 역사를 바꾼 포항의 다섯 가지 기록

3. 우승 경력


'''대회'''
'''횟수'''
'''시즌'''
'''K리그1'''
5회
1986, 1988, 1992, 2007, 2013
'''FA컵'''
4회
1996, 2008, 2012, 2013
'''리그컵'''
2회
1993, 2009
'''ACL'''
3회[28]
1996-97, 1997-98, 2009
'''기타 기록'''
'''제22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1974)'''
'''제12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리그 우승(1975)'''
제14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준우승(1977)
제32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1977)
제2회 실업축구회장배 준우승(1978)
'''제3회 실업축구회장배 우승(1979)'''
'''제18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리그 우승(1981)'''
'''1982 코리안 리그(제19회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
제40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1985)
제37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준우승(1989)
'''2010 구정컵 국제축구대회 우승'''
'''클럽 수상'''
'''2009 AFC 챔피언스 리그 페어플레이 상'''
'''2009 AFC 선정 올해의 아시아 최고 클럽'''
'''K리그 유소년 클럽상 3회 (2011, 2013, 2016)'''
'''K리그 그린 스타디움상 4회 (2014~2017)'''

3.1. 우승 상세 정보


'''1986 축구대제전 우승'''
'''감독'''
최은택
'''코치'''
이회택 박영태
'''주요
선수'''

정기동 박경훈 남기영 전차식 박성화 강태식 이흥실 '''최순호(C)''' 최상국 호샤 조긍연 박철우 김익형 김창효 백치수 김창효 심규선 유동관 이길용 허태식 백남수 김철수
'''1988 한국프로축구대회 우승'''
'''감독'''
이회택
'''코치'''
김순기 김철수
'''주요
선수'''

정기동 '''박경훈(C)''' 공문배 유동관 강태식 이흥실 이계원 이기근 조긍연 김홍운 최상국 조병득 김민구 김상호 김종부 백치수 유병옥 윤성효 이길용 황영우
'''1992 한국프로축구대회 우승'''
'''감독'''
이회택
'''코치'''
허정무 김순기
'''주요
선수'''

차상광 '''홍명보(C)''' 이영상 권형정 박태하 이원철 최문식 박창현 차상해 라데 박경훈 유동관 이기근 이흥실 장영훈 김상호 나승화 남기영 공문배 윤덕여
'''1993''' '''아디다스컵''' '''우승'''
'''감독'''
허정무
'''코치'''
김순기 정해성 정기동
'''주요
선수'''

이명열 권형정 이영상 노태경 신성환 윤성효 이계원 장영훈 박창현 차상해 최문식 공문배 김기남 백기홍 '''유동관(C)''' 이원철 라데 쿤티치 홍명보 황선홍
'''1996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
'''감독'''
박성화
'''코치'''
윤덕여 유동관 정기동
'''주요
선수'''

드라간 '''공문배(C)''' 안익수 노태경 고병운 백기홍 박영섭 장영훈 전경준 조진호 서효원 이명열 박지호 마말리 시모 장현호 김동기 이승협 이원철 임근재 최상훈 홍도표
'''1996-97'''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
'''감독'''
박성화
'''코치'''
윤덕여 유동관 정기동
'''주요
선수'''

드라간 노태경 안익수 공문배 고병운 전경준 홍명보 '''박태하(C)''' 서효원 장영훈 코놀 박지호 박영섭 조종화
'''1997-98'''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
'''감독'''
박성화
'''코치'''
윤덕여 유동관 정기동
'''주요
선수'''

김이섭 '''이영상(C)''' 안익수 싸빅 이승엽 자심 최문식 황선홍 이동국 백승철 코놀 박태하 김일진 서효원 고병운 조종화
'''2007 K리그 우승'''
'''감독'''
세르지오 파리아스
'''코치'''
박태하 김성수 빈야스
'''주요
선수'''

정성룡 조성환 최효진 황재원 박원재 황지수 '''김기동(C)''' 오승범 따바레즈 조네스 슈벵크 신화용 김성근 김광석 최태욱 이창원 박희철 신광훈 고기구 이광재
'''2008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
'''감독'''
세르지오 파리아스
'''코치'''
박창현 김성수 남창훈 빈야스
'''주요
선수'''

신화용 최효진 조성환 박원재 황지수 '''김기동(C)''' 김재성 황진성 데닐손 스테보 이광재 신형민 박희철 김광석 남궁도 김형일 노병준
'''2009 피스컵 코리아 우승''' [29]
'''감독'''
세르지오 파리아스
'''코치'''
박창현 최문식 김일진 자이로
'''주요
선수'''

신화용 '''황재원(C)''' 김광석 최효진 신형민 김재성 황진성 노병준 데닐손 스테보 김형일 김태수 송창호 유창현 조찬호 김기동 박희철 조홍규 오까야마
'''2009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감독'''
세르지오 파리아스
'''코치'''
박창현 최문식 김일진 자이로
'''주요
선수'''

신화용 '''황재원(C)''' 김형일 최효진 신형민 김재성 황진성 노병준 데닐손 스테보 송동진 김광석 조홍규 오까야마 송창호 조찬호 김기동 유창현 송제헌 박희철 김태수
'''2012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
'''감독'''
황선홍
'''코치'''
강철 윤희준 김일진 플라비오
'''주요
선수'''

신화용 김광석 김원일 신광훈 박희철 '''황지수(C)''' 이명주 황진성 아사모아 노병준 박성호 황교충 조란 신진호 김대호 고무열 조찬호 유창현 김진용 김다솔 이원재 정홍연
'''2013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
'''감독'''
황선홍
'''코치'''
강철 윤희준 김일진 플라비오
'''주요
선수'''

신화용 김광석 김원일 신광훈 김대호 '''황지수(C)''' 이명주 김승대 고무열 노병준 박성호 김다솔 김재성 신영준 김준수 조찬호 유창현 김은중 배천석 김태수 윤준성 박선주
'''2013 K리그 클래식 우승'''
'''감독'''
황선홍
'''코치'''
강철 윤희준 김일진 플라비오
'''주요
선수'''

신화용 김광석 김원일 신광훈 김대호 '''황지수(C)''' 이명주 김승대 고무열 노병준 박성호 김다솔 김재성 신영준 김준수 조찬호 유창현 김은중 배천석 김태수 윤준성 박선주

3.2. 개인 수상


'''개인 수상 기록'''[30]
'''리그 MVP'''
(4회)
이흥실 (1986 시즌 ,/ 17경기 5득점,)
박경훈 (1988 시즌 ,/ 12경기,)
홍명보 (1992 시즌 ,/ 29경기 1득점,)
따바레즈 (2007 시즌 ,/ 28경기 2득점 13도움,)
'''리그 득점상'''
(5회)
최상국 (1987 시즌 ,/ 30경기 15득점,)
이기근 (1988 시즌 ,/ 23경기 12득점,)
조긍연 (1989 시즌 ,/ 39경기 20득점,)
이기근 (1991 시즌 ,/ 37경시 16득점,)
차상해 (1993 시즌 ,/ 23경기 10골,)
'''리그 도움상'''
(6회)
최상국 (1987 시즌 ,/ 30경기 8도움,)
김종부 (1988 시즌 ,/ 15경기 5도움,)
이흥실 (1989 시즌 ,/ 39경기 11도움,)
라데 (1996 시즌 ,/ 32경기 14도움,)
따바레즈 (2007 시즌 ,/ 28경기 13도움,)
손준호 (2017 시즌 ,/ 35경기 14도움,)
강상우 (2020 시즌 ,/ 26경기 12도움[31],)
'''리그 신인상'''
(6회)
이흥실 (1985 시즌 ,/ 21경기 10득점 2도움,)
이동국 (1998 시즌 ,/ 15경기 7득점 2도움,)
문민귀 (2004 시즌 ,/ 24경기 1도움,)
이명주 (2012 시즌 ,/ 35경기 5득점 6도움,)
고무열 (2013 시즌 ,/ 34경기 8득점 5도움,)
김승대 (2014 시즌 ,/ 30경기 10득점 8도움,)
송민규 (2020 시즌 ,/ 27경기 10득점 6도움,)
'''리그 감독상'''
(5회)
최은택 (1986 시즌 ,/ 우승, 6승 9무 7패,)
이회택 (1988 시즌 ,/ 우승, 9승 9무 6패,)
이회택 (1992 시즌 ,/ 우승, 13승 9무 8패,)
파리아스 (2007 시즌 ,/ 우승, 15승 6무 10패,)
황선홍 (2013 시즌 ,/ 우승, 21승 11무 6패,)
김기동 (2020 시즌 ,/ 3위[32], 15승 5무 7패,)
'''FA컵 MVP'''
(4회)
조진호 (1996 시즌)
최효진 (2008 시즌)
황지수 (2012 시즌)
신화용 (2013 시즌)
'''FA컵 득점상'''[33]
(1회)
스테보 (2009 시즌 ,/ 5득점,)
'''FA컵 지도자상'''
(3회)
박성화 (1996 시즌 ,/ 우승,)
파리아스, 박창현 (2008 시즌 ,/ 우승,)
황선홍, 강철 (2012 시즌 ,/ 우승,)
'''클럽 월드컵 득점상'''
(1회)
데닐손 (2009년, / 3경기 4득점,)[34]

4. 유소년 시스템


'''포항 스틸러스 유소년 시스템'''
'''U-18 '''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2004~2012)[35]
포항제철고등학교 (2013~ )[36]
'''U-15 '''
포항제철중학교#s-5
'''U-12 '''
포항제철동초등학고(육성반)
포항제철서초등학고(보급반)
포항제철초등학교(2017~ )[37]

그 외에 직접 운영하지는 않지만 여자축구팀을 운영하는 포항항도중학교, 포항여자전자고등학교는 포항 스틸러스의 유니폼을 그대로 쓴다.

5. 역대 감독



'''포항 스틸러스 역대 감독'''
''''''
'''국적'''
'''이름'''
'''기간'''
1대

한홍기
1973 ~ 1984[38]
2대

최은택
1985 ~ 1986[39]
3대

이회택[40]
1987 ~ 1992[41]
대행

조윤옥
1988 ~ 1990[42]
4대

허정무
1993 ~ 1995[43]
대행

김순기
1993 ~ 1994[44]
5대

박성화[45]
1996 ~ 2000[46]
6대

최순호[47]
2000 ~ 2004
7대

세르지오 파리아스[48]
2005 ~ 2009[49]
8대

레모스 올리베이라
2010[50]
대행

박창현[51]
2010
9대

황선홍[52]
2011 ~ 2015[53]
10대

최진철
2016
11대

최순호
2016 ~ 2019
12대

김기동[54]
2019 ~

6. 코칭 스태프 명단




7. 선수 명단





8. 시즌별 일람




9. AFC 챔피언스 리그




10. 상징



10.1. 가로검빨과 시안블루


포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강렬한 검정 빨강 가로 스트라이프 유니폼.''' 1984년 프로화 이후 처음 입기 시작해 현재까지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포항의 상징이자 정체성'''이다. 특히 2018년 홈 유니폼이 창단 45주년을 기념하여 '백 투 더 오리지널(Back to the Original)'이라는 컨셉으로 포항제철 축구단 시절 1985년부터 1992년까지의 초기 유니폼에서 모티브를 얻어 특유의 '''빨강''''''검정''' 스트라이프를 당시의 배열 순으로 그대로 차용했다.
또한 법인화 이후 1996년 부터 홈 유니폼의 메인 컬러로 사용한 '''시안블루'''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을 2연패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0년까지 디자인을 유지하며 사용되었다가 다시 '''검정''' '''빨강''' 스트라이프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쇠돌이 20주년이 되는 2017년, 1997년 스타일 그대로 복원하여 원정 유니폼으로 사용하였고, 현재까지 원정 유니폼의 색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10.2. 영일만 친구




가수 최백호의 노래. K리그 판 '''You'll Never Walk Alone'''
포항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노래이기에, 오래 전부터 포항 스틸러스 팬들의 응원가로 쓰여왔다.[55] 4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1970년대부터 경상북도 포항시가 인구 51만에 이르는 현재까지 포항 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해 왔다.
홈경기에서 골을 넣었을 때 이 노래가 골송으로 나오며, 서포터즈들이 승리가 확정된 88분 즈음부터 단체 합창에 들어간다. 특히 홈 경기에서는 승전시 서포터 일반관중 구분없이 모두가 합창하는 영일만 친구는 소름이 돋을 정도. 프로축구팀 중에서 향토 노래를 응원가로 삼고 있는 팀은 포항 말고는 없기 때문에 K리그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기도 하다.

10.3. 스틸타카와 스틸러스 웨이


포항 고유의 특징이 있다면 바로 '''미드필더의 세밀한 패스에 이은 호쾌한 공격 축구'''다. 해외 축구 팬들에게 '''K리그는 뻥 축구에 시간끌고 수비 축구라는 고정관념'''을 한 방에 날려버렸으며, 심지어는 야구 팬들은 야구 중계 안 해준다고 채널을 돌려보다가 포항 축구를 보고 ''''K리그도 재미있네?'''' 하고 K리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남들이 뻥축 시전하고 있을 때 포항은 유스 시절부터 패스 축구를 가르쳐 왔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패스 축구가 팀 스타일이 됐다.
공격축구 자체는 1990년대에 황선홍-라데 시절부터 유명했던 포항이지만 파리아스 감독 이전에는 감독 바뀌면 스타일도 바뀌는 팀이었다. 박성화 감독과 최순호 감독 첫번째 재임기가 대표적인데 이 중 최순호 감독 재임기간 리그 꼴찌까지 떨어져 본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에[56] 준우승으로 거뒀음에도 포항 팬들에게는 엄청난 흑역사이다.
보통 K리그 팀들의 악폐습이 1골 넣으면 바로 잠그고 쓸데없이 심판 잡고 늘어지거나 경기 템포를 늦추는 것이었지만, '''포항은 그런 짓 하면 이겨도 구단에서 수당을 안 준다'''. 이것이 2009 시즌부터 도입된 그 유명한 '''Steelers-Way'''로 ▲실제 경기시간(Playing Time)을 5분 이상 늘리고 ▲경기 매너를 지키며 ▲심판의 권위를 존중하고 판정을 겸허히 수용하는 동시에 ▲포항 선수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포항의 경기를 보면 1골 넣어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2005년 파리아스 감독이 처음 부임하고 가장 먼저 선수들에게 지시한 것이 '''백 패스 금지'''[57]였고, 당시 뻥 축구와 고리타분한 전술[58]로 정체되어 있던 K리그에 새 바람을 몰고 오며 '''"파리아스 매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다. 파리아스 감독은 이러한 공격 축구로 2007년 K리그 우승, 2008년 FA컵 우승, 2009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리그컵 우승을 일구어 내며 언론의 찬사를 받는데 이 시절 포항의 경기는 성적도 잘 나오고 결정적으로 경기가 재미있었다. 이기든 지든 기본 3골부터 시작하는 경기가 많고, 2골을 먼저 실점하더라도 절대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2009년 9월 13일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9 K리그 22라운드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를 8-1로 꺾어 '''한 경기 최다 골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아스 재임 시절에는 이러한 공격 성향이 너무 강해서 후반 막판 어이없는 실점으로 무를 캐는 경기도 많았는데, 2011년 후임으로 황선홍 감독 취임 이후 2011년, 2012년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미드필더와 수비를 정비하면서 황선홍 종반기에는 K리그에서 손꼽히는 패싱축구를 구사하는 팀으로 거듭났다. 2012 시즌 중반, 당시 유로 2012에서 화제가 되던 스페인 국가 대표 팀의 제로 톱(4-6-0) 전술을 장착하는가 하면, 황선홍 감독은 상황에 따라서 원 톱, 투 톱까지 자유롭게 용병술을 구사하며 상대 팀들을 농락하고 있다. 이러한 패스 플레이에 감탄한 축구 팬과 언론들이 붙인 별명이 FC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에서 따온 '''스틸타카'''다.
그러나 스틸타카란 용어는 문외한에 가까운 기자들이 패스 축구 = 티키타카라는 인식 때문에 붙인 별명이기 때문에 실제로 포항이 바르셀로나 식의 점유율 축구를 구사하는 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티키타카 문서를 읽고 티키타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알겠지만, 간단히 말해 티키타카에서 패스는 공을 오래 가지고 있기 위한 수단이지만 포항의 전술에서 패스는 그저 상대방 문전에 빨리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애초에 패스의 목적 자체가 다르다. 필요하다면 장신 타겟맨 전방에 박아놓고 길게 연결하는 뻥축구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59]
파리아스 이후 '스틸타카'로 지칭되는 공격적인 패싱 축구가 포항의 팀컬러로 완전히 정착했고, 황선홍을 거쳐 최순호 감독의 두번째 재임기를 이어 파리아스 시절 선수로 활약했던 김기동 감독이 부임하며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60] 역사가 짧고 부침이 많은 K리그 팀들에게 명문 칭호를 붙일수 있느냐는 논란거리지만 만약 '''K리그에 명문이 있다면 그건 포항'''[61]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발언은 괜히 나온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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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2010 시즌에는 스틸러스 웨이를 계승한 '''"아름다운 축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적이 있다. K리그에서도 2010 시즌 개막 전에 스틸러스 웨이를 참고하여 '''K리그 5분 더(5 minutes more)''' 캠페인을 벌이기로 합의하여 포항의 스틸러스 웨이를 다른 팀들에게서도 볼 수 있게 되었으나... 파리아스 감독의 후임으로 데려온 모 감독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축구'''를 펼치는 바람에 2011 시즌부터는 다시 스틸러스 웨이라고 부르고 있다.

10.4. 포항유스, '화수분 축구'


'''자타공인 K리그 최고의 유소년 시스템'''

K리그에서 최초로 유소년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그러한 토대 위에 선수육성에 관해서는 예전에도 잘했고 지금도 잘한다.
구단 홈페이지에는 '2003년 유소년 시스템 도입'이라고 하긴 하는데 실질적으로 유소년 시스템이 정착된 시기는 포철공고 축구부가 창단된 1993년이고 본격적인 포항 스틸러스 산하 유소년 구단으로서의 관리가 2003년부터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62] 노태경, 이동국, 신화용, 황진성, 김승대, 강현무 등이 이 시스템을 거친 대표적인 선수들이고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희대의 축구천재라 평가받던 김병수[63]도 고질적인 무릎부상 때문에 프로데뷔를 못했을 뿐이지 포항 유스출신이다. 이렇게 1990년 부터 체계를 다진 포철동초-포철중-포철고로 이어지는 '''유소년 클럽'''의 힘으로 꾸준히 선수들을 발굴하며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상위권 팀들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는 성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8~90년대에는 창립자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국가대표급 선수들과 K리그 최초로 용병을 영입하는 등 나름대로 부자 구단이었으나[64], 모기업인 포스코가 상장을 하게 되고 민영기업으로 변화함에 따라 외국 주주의 비중이 50%를 넘어선 2000년대 이후로는 모기업의 확실한 지원을 받는 구단들에 비해 항상 부족한 예산에 시달리게 된다.[65] 이 유소년 시스템은 모기업의 지원이 확연히 줄어든 2000년대 포항에 큰 힘이 되었고, 결국 2013년에는 선수단에 외국인 선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스쿼드의 절반 이상을 유소년 시스템에서 배출한 선수들로 채우고 '''K리그 30년 역사상 최초로 시즌 더블(리그+FA컵)을 달성하기도 한다.'''
유망주 위주의 선수단 구성도 그렇고, 화려한 패스 축구의 팀 컬러도 그렇고, '''여러모로 K리그의 아스날.''' 심지어 한준희 축구 해설위원은 이런 포항을 아스날에 빗대어 '''"포스날"''' 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 시즌에는 U-18 유스팀이 "알 아인 인터내셔널 U-17 토너먼트 2014"에서 맨체스터 시티 유스를 2:1로, UAE 17세 대표팀을 4:1로 대파하는 기염을 토했다.경기 영상
하지만 슬프게도 자유 계약 제도의 최대 피해자. 그 대표적인 예로 유소년 시스템을 통해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보낸 한 축구 영재는 K리그 입단 시 홀연히 다른 팀으로 가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부터 선수 하이재킹에 불만이 많았던 시민구단들도 폭발한데다가 드래프트 반대 측에 서 있던 포항까지 드래프트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드래프트 제도가 부활해버렸다.[66] 쉽게 말해서 없는 돈 쪼개서 애들 키웠더니 남 좋은 일만 시킨 꼴. 거기다 우선 지명한 선수들도 잘 키워 놓으면 돈 많은 수도권 구단들이 채가는데다, 선수들도 인프라가 좋은 수도권으로 가려 하니 포항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속상할 따름이다.
그나마 2010년대 들어서는 각 구단들도 유스에 신경쓰고, 대형구단들이 유스보다 검증된 외부 영입에 더 신경을 쓰면서 적어도 포항이 애지중지 키운 유스들이 털리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포항 역시 외부 영입은 줄여도 유스 선수들은 확실히 잡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많은 포항 출신 유스들이 포항 스틸야드에 입성하고 있다.
드래프트 제도가 다시 폐지되고 자유계약제로 전환되고 이런 일이 더이상은 없을 줄 알았는데...
2014년 6년 동안 공들여 키운 선수가 고등학교 졸업 후 우선 지명을 받아 포항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규정의 빈틈을 이용해[67] 돌연 해외 팀으로 이적해버리고 만다. 물론 법을 어긴 것은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는 없다. 하지만 포항뿐만 아니라, 한국 축구계에서도 이번 일은 꽤 충격적인 일로 다가온 듯하다. 이런 와중에 백승호는 자신의 SNS에 묘한 글을 남기도 했다. 정작 선수 본인은 별로 반성의 기색이 없는지 “축구선수로 성공하려면 유럽 나가야한다, 후회안해”라는 발언으로 축구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클럽 산하 유스는 아니지만 우선지명한 선수들을 포항 유소년 팀을 지도했던 김병수 감독이 있는 영남대학교 축구부에 진학시켜 경험을 쌓게 한 다음 프로로 데뷔시키기도 했었다. 신진호,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 김준수, 정원진, 이상기 등이 이런 과정을 거쳐 포항에 데뷔하여 활약했다. 김병수 감독이 프로 감독으로 옮긴 이후 영남대학교를 거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11. 타 구단과의 관계


구단의 오랜 역사 만큼 타 구단들과도 여러 모습으로 얽혀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대표적인 라이벌로는 이제는 대외적으로도 많이 유명해진 동해안 더비의 '''울산 현대'''가 있고, 박주영황선홍 등으로 엮인 또 다른 검빨 FC 서울, 수포동맹이라 불리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그리고 일화시절 여러 악연을 주고 받은 현재의 성남 FC 등이 있다.
또 같은 모기업으로 이어진 전남 드래곤즈와 광역 생활권을 공유하면서 2018 시즌 이후 급격하게 부상한 대구 FC 등이 있다.

11.1. 동해안 더비, 울산 현대


'''동해안 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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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스틸러스'''
'''울산 현대'''
FIFA에서 소개할 정도로 유명해진 K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더비인 동해안 더비의 라이벌. 같은 동해안에 위치한 팀이기도 하고 포항과 울산의 묘한 지역감정[68]때문에 '''서로 제발 좀 그만 만나게 해달라고''' 팬들이 사정사정할 정도로 악연이 깊은 라이벌이기도 하다.
늘 중요한 경기마다 만나서 서로의 발목을 잡았으며 대표적인 것이 바로 98년 플레이오프 2차전. 당시 울산 소속이던 김병지에게 헤딩골을 허용. 1승 1패로 동률에서 승부차기 패배로 통한의 준우승을 한 경기. 이 경기는 K리그를 말할때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경기중 하나다.[69] 2008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승부차기를 앞두고 골키퍼를 그 경기가 데뷔전인 신인 김승규로 교체한 울산에 통한의 승부차기 패배를 하기도 했다. 두 팀모두 리그 3~6위권의 고만고만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보니 PO만 했다하면 마주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포항 팬도 울산 팬도 정규시즌이라면 모를까 PO에서는 제발 좀 안 만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 해의 서로의 전력이 어떻게 차이가 나든 동해안 더비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결과를 불러오는 지라..
덤으로 포항이 애지중지 키운 오범석FIFA 제소 직전까지 가는 다툼 끝에 러시아로 떠나고선 하필 울산으로 복귀하는 바람에 최근들어 사이는 더 안 좋아졌다. 게다가 하필이면 복귀전 상대가 포항이었고 그날 포항은 종료직전에 동점골을 먹는 바람에 리그 최다 연승 기록도 깨졌으니...그걸로 모자라 2011 시즌 직전에는 포항에 있던 설기현이 '''또''' 울산으로 이적했다. 포항과 울산의 질긴 악연은 현재진행형.
재미있는 것은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팬들과 달리 구단끼리는 서로 친분(?)이 있는지 시즌이 끝나면 선수 이적이 꽤 활발한 편. 포항은 호시탐탐 울산의 주전선수를 노리고 있고, 울산은 역으로 포항의 유망주나 포항에서 버린 선수를 잘 주워 가는 편이다. 구단 스태프나 고위층에선 크게 신경 안 쓰는 듯. 하지만 '''팬들은 예외.''' 서로 사이가 얼마나 나쁘냐면 더비 경기가 끝난 후에는 서포터들끼리의 충돌이 '''100% 일어난다.''' 서로에게 쓰레기통을 던지거나(…) 시비가 붙어서 주먹다짐을 하거나(…) 단적인 예로 2019년 12월 1일 K리그 1 38라운드 그...경기에서 울산이 포항에게 4:1로 대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자 포항 서포터들이 울산의 준우승을 비하하는 노래와 "별 두개가 명문이냐?"등의 비하걸개를 펼쳐보였고 빡친 울산 서포터들이 포항 원정석 쪽으로 다가가 주먹다짐을 하려듯이 욕을 하자 포항팬들은 이내 울산 서포터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울산의 준우승을 비하하는 노래 "별이 두개레"를 부르며 울산팬들을 비하하며 놀려댔고 결국 양팀 패싸움 직전까지 간 일화가 있다.
그리고 2013 시즌, [70] 세계 최초로 단일 리그에서 라이벌 관계의 1, 2위 팀이 최종전에서 만나서 이긴 팀이 모두 가져가는 희대의 매치업이 성사됐고 후반 추가시간에 김원일라스트 미닛 골을 넣으면서 포항 팬들은 환호를, 울산 팬들은 절망을 맛보았다. 심지어 경기 장소가 울산의 홈인 울산문수축구경기장. 그리고 2013-2014 시즌 라 리가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2019 시즌 2013 시즌과 같은 날인 12월 01일 울산 홈경기로 펼쳐진 파이널 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울산이 비기기만 해도 우승하는 상황에 포항이 4:1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울산의 우승을 저지했다. 결국 이날 우승을 못한 울산은 그 전 라운드까지 승점이 3점밖에 차이나지 않던 전북현대가 1:0 으로 강원을 이김으로써 골득실 1점 차로 전북에게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두팀 모두 우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우승 트로피를 울산과 전북에 모두 둘 수 밖에 없었다.[71] 이 트로피를 전북이 가져감으로써 2013년처럼 울산은 눈앞에서 우승 트로피가 사라지고 말았다.

11.2. 서로 다른 검빨, FC 서울


울산 다음으로 사이 나쁜 클럽으로 FC 서울와 유니폼 색깔이 같고 줄무늬 방향만 다른데(포항-가로/서울-세로) 타 팀팬들은 이를 두고 검빨 동맹이라고 자주 불렀다. 이 말 처음 나오던 시절 포항의 서울전 전적이 안좋았기에 서울 싫어하는 타 팀 팬들이 어느정도 비아냥을 담아 동맹이라 불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당사자들은 이 말 싫어한다.''' 박주영 계약파동으로 인해 포항팬들은 이미 서울 하면 이를 갈게 되었거니와, 박태준 회장의 축구사랑에 힘입어 한 연고지에서 40년 동안 터를 잡으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프로 구단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포항인지라 다른 팀도 아닌 서울과 엮이는걸 굉장히 기분 나빠했다. 당사자들은 검빨이란 말 대신 서로 고철과 패륜으로 부르며 깐다. 언론에서는 이 명칭이 꽤 그럴싸하다고 보는지 2015년 이후 양 팀의 대결을 검빨더비라 칭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팬들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만큼 지속적으로 사용된다면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
2007~08년엔 포항이 상당히 밀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2009년부터 균형을 잡아서 포항은 상암에서 약세를 보이고 서울은 스틸야드에서 밀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포항은 2006년 8월 이후 상암에서 승리가 없었으나 2014년 4월 9라운드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면서 지긋지긋한 상암 징크스를 털어냈다. 그러나 14년 7월에는 FA컵, 8월에는 아챔에서 서울과 상암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벌여 고배를 마시면서 서울과의 악연은 계속되고 있다. 이 2014 시즌에는 유독 자주 부딪쳐서 한 시즌만에 6번이나 만났다. 리그 3전, FA컵 1전, ACL 2전. 전적은 1승 4무 1패, 승부가 났던 두 경기 모두 1대 0 한골차이 승부일만큼 박빙이지만, 속내를 보면 4무 가운데 3경기는 토너먼트 경기였고 ACL 1차전을 제외한 2경기 모두 승부차기 혈투 끝에 서울이 이겼다.
두 팀의 감독들도 흥미로운 스토리를 뽑아냈는데 바로 현역시절 한국 공격진을 이끌었던 황선홍 감독과 최용수 감독의 라이벌 구도다. 리그와 토너먼트에서 자주 부딪치고 리그 승률은 포항이 나쁘지 않은데 FA컵과 아챔같은 토너먼트에서 서울에게 일격을 맞고 탈락하는 구도가 14~15시즌(14시즌에는 아챔과 FA컵, 15시즌에는 FA컵) 연달아 발생하니 황선홍 감독은 14시즌 이후 최용수 감독만 생각하면 화가 난다는(인간적으로 싫어한다는건 아니고) 인터뷰를 남기며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사를 누차 피력했고 최용수 감독도 특유의 너스레로 화답하면서 라이벌 구도가 생겨났다. 황선홍 감독이 15시즌을 마지막으로 물러나면서 흐지부지 되나 했는데 후임 최진철 감독이 역시 최용수는 이기겠다고 단언했고 실제로 첫 대결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2016년 6월 FC 서울의 최용수 감독이 돌연 중국 장쑤 쑤닝으로 떠나고 지난 시즌까지 포항의 감독으로 치열하게 부딪쳤던, 포항팬들이 누구보다 사랑했던 황선홍 감독이 FC 서울 감독으로 부임하며 한동안 더욱 흥미로운 전개가 이어졌다. 황선홍이 프런트와 합작으로 서울을 말아먹어 버려서 흐지부지 되었지만.
2016년부터 한동안 포항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거나 유망주로 각광받던 선수가 서울행을 택하고 있다. 2016년 신진호, 2017년 신광훈이명주, 2018년 정원진.[72]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부 서울 팬들은 '''족보없는 축구는 가라더니 스스로 나서서 족보를 다 팔아치우고 있다'''고 비꼬기도 한다.
그리고 연고지 역사를 가지고 불을 뿜기도 한데, 바로 이 서울의 팬들이 포항의 무이전 역사를 부정한다. 서울팬은 서울로의 연고 재이전 명분을 내세우면서 포항 역시 대구에서 포항으로 연고이전한 구단이다고 하며[73], 포항팬은 광역연고 시절에도 포항은 연고지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무슨 이전이냐고 맞선다.[74]

11.3. 수포동맹, 수원 삼성 블루윙즈


수원에 대한 감정도 별로 안 좋은데, 울산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오프 악연도 많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팀'''이라는 자부심에 사는 포항 팬들은 "축구 수도 수원"이라는 말 자체를 아주 싫어한다. 이건 포항 외에 서울이나 다른 축구 팬들도 마찬가지.[75] 그래서인지 포항은 홈에서 수원과 경기할 때는 압도적인 결과를 보여주는데 2004년 이후 포항에서 치러진 수원전에서 포항은 단 1패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홈에서 내준 실점조차도 10년 동안 단 5실점뿐이다. 이 정도의 학살은 다른 라이벌 관계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였는데 2014년 상황이 역전되어 4전 3패했다. 원정에서 4대1로 지는가 하면 다음 원정때는 한점차 리드를 84분, 88분에 골은 먹으면서 패배하고...마지막 라운드에는 10년 된 홈 징크스마저 깨지며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잃었다.
여담으로, 같은 삼성 소속인 삼성 라이온즈가 2012년부터 포항 야구장을 제 2구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스포츠팀이라고는 포항 스틸러스 하나밖에 없었던 포항시의 새 식구가 되었다. 다만 삼성의 주 연고지는 포항이 아닌 대구인지라, 서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바쁜 수원 삼성 블루윙즈 팬덤과 달리 삼성 라이온즈 팬덤과의 사이는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편.[76] 2017년에는 10년 넘게 포항에서 함께 뛴 로컬보이 신화용이 수원으로 가게 되었고 이적 후 첫 맞대결에서 수원이 1:0으로 이기기도 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수원과 포항은 줄곧 같은 스플릿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상위스플릿에, 2016년은 하위스플릿에서 만났다. 이 때문에 팬들은 수포동맹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지만 2017년 들어서 수원이 상위 포항이 하위로 가면서 수포동맹이 깨졌다. 그러나 2018년에 둘이 같이 상위로 가면서 수포동맹이 부활했다. 2019년에는 수원이 파이널 B로 떨어지고 포항이 파이널 A로 올라가면서 수포동맹이 또 깨졌다.
2016년부터 FA컵에서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수원은 2016년부터 4년 연속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반면,[77][78] 포항은 4년 연속 32강에서 광탈했다. 더욱 처참한 건 2019년 실력이 비등비등한 수원에게 패한 것 제외하고는 모두 약체들에게 졌다는 것.[79][80]

11.4. 클래식 라이벌, 성남 FC


공식 라이벌은 아니지만 인연 질긴 팀을 꼽으라면 성남 FC가 있다. 역시 K리그 명승부 중 하나인 1995년 K리그 챔피언 결정전, 11월 11일 포항전용구장에서 벌어진 2차전은 양 팀이 선제골(포항)-추가 골(포항)-추격 골(일화)-동점 골(일화)-역전 골(일화)-재역전 골(포항)으로 이어졌고 당시 득점은 황선홍, 신태용(각 2골). 라데, 고정운(1골)으로 K리그 올드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명경기다.[81] 중립구장인 안양종합경기장에서 개최된 최종전에서는 포항이 3차전 연장 골든골을 이상윤에게 허용하며 성남이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2007년에는 포항이 복수(포항 우승). 이후 2009년까지 포항이 성남을 탈탈 털다가[82] 2009년에는 다시 성남이 복수를(성남이 결승 진출)하며 클래식 더비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2009, 2010년에는 성남이 포항을 털더니 그 뒤로는 2011년 FA컵에서 1회, 2014년 리그 1회를 제외하면 포항이 성남을 쉴새없이 털고 있다.
이런 역사 때문에 1990년대 한국프로축구를 기억하는 올드비들이 특별히 이렇게 부르고 있다. 다만 언론이나 신규 팬층이 이둘의 관계에 주목하는 경우는 드물다. 거기에 성남이 기업구단에서 시민구단이 되면서 크게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예전과 같은 관계로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2017시즌 부터 성남이 2부 리그로 강등되어서 한동안 리그에서 만나지 못했다. 2019년 성남이 승격하면서 다시 클래식 라이벌리도 열릴 전망이다.
울산과 달리 프런트와 팬들 모두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11.5. 제철가 형제, 전남 드래곤즈


전남도 미묘한 라이벌리가 있는데, 이는 포항과 전남이 같은 계열사[83] 아래 있기 때문에 미묘한 경쟁의식[84]이 생겨서이다.
물론 같은 계열사이기 때문에선지 시즌이 끝나면 서로의 선수와 스태프들의 이동도 많은 편이고, 2019년 코로나19 사태로 포항이 훈련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전남이 통크게 자신들의 훈련장 한 면을 내어주는 등, 서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고 오히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전남이 창단되기 전에는 포항이 광양의 축구열기를 고조시킨다는 명분으로 이벤트성 경기를 한 적도 있다.
언론에서는 어떻게든 '''제철가 더비''', '''형제 더비'''로 이름을 붙이려 하지만 양 팀 팬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오히려 서로 맞붙지 않는 경기에서는 형제(?) 팀을 서로 응원해주기도 한다.
다만, 일단 라이벌 의식은 있는 데다가 전남의 축구 스타일이 포항에게는 쥐약인 스타일이라 난타전이 나오거나 전남의 전방 압박으로 인한 한 골 싸움이 나오거나 하는 양상이 펼쳐진다.
2018년 전남 드래곤즈가 다이렉트로 강등되면서 2019년부터는 FA컵 외에는 맞대결을 볼 수 없게 되었다.

11.6. 경북권의 맞수, 대구 FC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창단된 시민구단인 대구 FC와의 맞대결을 대구경북 지역과 축구매체 등 여러 언론사들에서 지역명을 본 따서 TK 더비[85]라고 부른다. 하지만 전력차가 너무나 명확하고, 역사나 인기에서도 비교가 안되기에 팬들은 별로 개이치 않는다. 오히려 원정거리가 짧아서 서로 좋아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대구에 프로축구단이 탄생하기 전부터 당시 포항 스틸러스가 정책적으로 대구 지역의 축구팀들을 많이 후원하기도 하였고[86], 지역적으로도 포항에서 자란 사람이 비교적 대도시인 대구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기에, 대구 지역에는 포항 스틸러스를 응원하는 축구팬들이 많다.[87] 대구 FC 창단 이 후 지역 축구팬들을 흡수하긴 했지만, 아직도 대구 팬들 중에는 두 팀 모두 좋아하는 팬들이 많기에 비교적 최근까지도 동일 지역 구단으로써 프랜들리한 느낌이 크다.
하지만 2018 시즌 대구 FC는 창단 14년만에 FA컵 첫 우승과 2019년 대구축구전용경기장인 대팍의 개장과 함께 대구의 경기력과 인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순위와 평균관중 수를 포항을 따라 잡았다. 또한 2019 시즌 4번의 맞대결에서 포항이 무득점으로 1승도 거두지 못하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경북지역 명문으로써 자존심이 상한 상황이다. TK지역 한정으로 '''전통의 명문 vs 떠오르는 신흥 강호'''의 구도가 형성이 된 셈. [88]
전력차이는 있지만 예전부터 맞대결 시 서로 공격적으로 맞부딪히는 경우가 많아 2019 시즌 종료 시점까지 통산 경기에서 포항이 61골, 대구가 47골을 기록하는 등 생각보다 골이 많이 터지는 편이다. 2003년부터 2019년까지 K리그1 기준으로 보면 역대 전적에서는 포항이 대구에 19승 12무 11패로 앞서고 있지만 경기를 보면 승패가 그렇게 쉽게 갈리지는 않는다.

12. 유니폼





13. 엠블럼



13.1. 과거 엠블럼


[image][89]
[image]
[image]
[image]
'''1973~1982'''
'''1983~1984'''
'''1985~1994'''
'''1995~1996'''
[image]
[90]
[image]
[91]
[image]

'''1997~1998'''
'''1999~2002.08'''
'''2002.08~현재'''


13.2. 기념 엠블럼


[image]
'''40th ANNIVERSARY EMBLEM'''
'''40주년 엠블럼'''
2013년 창단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디자인된 엠블럼으로 2013시즌 K리그-FA컵 더블우승과 함께 더욱 의미가 깊은 엠블럼이 되었다. 클래식한 골드컬러를 사용하여 구단의 헤리티지를 표현하였고 엠블럼 상단에 40th를 통해 40년 역사를 되새겼다.

[image]
'''RETRO 20th ANNIVERSARY EMBLEM'''
'''쇠돌이 엠블럼'''
2017 시안블루 유니폼에 부착된 쇠돌이 앰블럼은 1997년 당시 마스코트인 쇠돌이가 들어간 유니폼을 착용한지 20주년이 되는 시즌을 기념해 디자인 되었다. 쇠돌이를 현재 스탠다드 엠블럼의 아웃라인 안에 삽입하여 새롭게 디자인한 콜라보레이션 엠블럼이다. 이후 공식 보조 엠블럼으로 사용되고 있다.

[image]
'''STEELYARD 30th ANNIVERSARY EMBLEM'''
'''포항스틸야드 개장 30주년 기념 엠블럼'''
포항스틸야드 30주년 기념 엠블럼은 스틸야드의 역사와 옛 정취를 녹여 디자인되었다. 구장의 입구에 서서 정면을 올려다 본 구도는 스틸야드의 위엄을 표현하였고, 실버(스틸) 색상을 사용하여 철옹성과 같이 단단하고 굳건한 인상을 주었다. 더불어, 스틸야드 글자는 옛 감성을 담아 한글로 디자인한 것도 특징이다.

14. 마스코트




15. 시설



15.1. 홈 경기장



'''포항 스틸러스 홈 경기장'''
'''1987년~1990년, 2003년, 2013년'''

'''1990년~'''
'''포항종합운동장'''

''''''포항스틸야드''''''

15.2. 클럽하우스




'''포항스틸러스 클럽 하우스'''
'''POHANG STEELERS CLUB HOUSE'''
'''준공일'''
2001년 1월
'''위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동해대로 2836
'''시설'''
연면적 1,232평 (지상 3층)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한국 프로스포츠 최초의 클럽하우스.'''

16. 명예의 전당



'''이름'''
'''내용'''
'''박태준'''
前 포스코 회장
'''포항 스틸러스'''와 '''포항 스틸야드'''의 창립자이자 아버지.
''' 한홍기'''
포항 스틸러스 초대 감독(1973~1984)
''' 이회택'''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73~1978)
前 포항 스틸러스 감독(1987~1992)
대한축구협회 이사 및 부회장
''' 박경훈'''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84~1992)
前 대한민국 U-17 대표팀(2004~2007)
''' 이흥실'''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85~1992)
'''최순호'''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85~1988,1991~1992)
前 포항 스틸러스 코치(1992~1993,1999~2000)
前 포항 스틸러스 감독(2000~2004,2016~2019)
대한축구협회 부회장(2013~2016)
現 포항 스틸러스 유스팀 총괄 기술이사(2019~ )
'''공문배'''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87~1998)
(포항 소속으로 200경기 이상 출장한 최초의 선수)
前 포항 스틸러스 코치(2007)
'''이영상'''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90~1999)
'''박태하'''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91~2001)
前 포항 스틸러스 코치(2005~2007)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2007~2011)
'''황선홍'''
포항스틸러스 선수(1993~1998)
前 포항 스틸러스 감독(2011~2015)
'''홍명보'''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92~1997,2002)
前 대한민국 U-23 대표팀(2009~201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2013~2014)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2017~ )
''' 라데 보그다노비치'''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92~1996)
'''김기동'''
前 포항 스틸러스 선수(1991~1993,2003~2011)
前 대한민국 U-23 대표팀 코치(2013~2016)
前 포항 스틸러스 수석코치(2016~2019)
現 포항 스틸러스 감독(2019~ )
2013년 5월 26일 대구 FC와의 경기에 앞서 '''창단 40주년'''을 기념하며 포항 스틸러스 명예의 전당을 만들었다. '''K리그 클럽이 자체적으로 명예의 전당을 만든 것은 최초'''다. 명문구단의 초석을 다지고, 뛰어난 기량을 펼친 이들 13인을 첫번째로 13인을 헌액했다.
헌액된 13명의 레전드는 헌액 기념패와 스틸야드 평생초청 VIP카드를 받으며 앞으로 있을 구단의 주요 행사에 우선적으로 초대 되는 특전이 주어진다. 향후 송라클럽하우스포항스틸야드 등 후보지 중 적합한 장소를 선정하여 명예의 전당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며 주기적으로 대상자를 선정하여 꾸준히 추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17. 인물




18. 등번호




19. 응원단


'''2020 포항 스틸러스 응원단'''
'''아나운서 '''
김용일
'''치어리더 스틸하트 '''
이수진, 권소영, 장혜원, 남민정, 김하연, 이예림, 박세아, 최홍라, 고정현, 이소영, 김가영
경북권 대표클럽인 만큼 대구-경북의 간판 야구팀인 삼성 라이온즈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전 삼성 라이온즈 응원단장이었던 김용일 아나운서를 중심으로 대구-경북의 간판 치어리더인 이수진 치어리더 팀장과 대전 출신으로 이적하게 된 남민정 치어리더를 중심으로 스틸하트와 응원전을 하게 된다.

20. 서포터즈




20.1. 응원가




21. 사건사고




22. 이야기



22.1. 전통과 인기


영국의 오래된 축구 팀들이 그러하듯이,[92] 공업 도시인 포항의 포항 스틸러스 역시 포항 제철소와 그와 관련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축구 팀인 데다[93] 1980년대~1990년대 포항시에서 문화생활이라고 할만한 것은 매주 열리는 축구 경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인기가 정말로 대단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9년 개막전에서는 지방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개막전 관중 4만을 찍기도 했다'''.[94] 인구 30만이던 시절부터 평균 관중 1만 이상을 찍고 있었으니 그저 할 말이 없을 정도.
매주 포항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홈구장인 포항 스틸야드 주변은 밀려드는 차량과 사람에 발 디딜 곳이 없다. 더욱이 대부분 구단 서포터스만이 열성적인 응원을 보내는 타 구단에 비해 포항은 서포터, 일반 시민 가리지 않고 응원 열기가 대단하다. 포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 중 스틸야드를 한번도 안 가본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2005년까지는 코레일에서 통근열차괴동역 너머에 있는 제철역(포스코 내에 있는 포스코 전용역)까지 가서 근처 포항 스틸러스 홈 구장으로 가는 관중들을 수송하기도 했었다.[95] '''대한민국 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구단 응원 열차였던 셈이다.'''
1990년대에는 하프 타임마다 해병대 의장대가 사열 시범을 보였고 꼬마 팬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포항 팬들로선 아쉬운 부분 중 하나. 대신 이후 해병대 응원대가 스틸야드 한 편에 자리잡게 되면서 해병대 응원이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
2008년 기준으로 관중 점유율과 연고지 인구 대비 관중 수가 상당히 높은데, 포항 인구가 50만이라는 걸 감안하면 포항의 평균 관중 1만은 수도권 팀들이 평균 관중 2만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팬들이 떨어져 나가는가 싶었는데 세르지오 파리아스라는 걸출한 명장 덕에 예전의 인기를 다시 회복했다. 2010년 시즌 또다시 암흑기를 보내면서 팬들이 떨어져 나가나 싶었지만, 2011 시즌 현역 시절 포항의 레전드 황선홍이 감독으로 부임하며 꾸준히 리그 상위권의 성적을 내며 다시 관중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심지어는 2016 시즌 구단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며 2부 리그 강등 문턱까지 갔음에도, 2017년 홈 개막전에서는 홈구장인 포항 스틸야드 매진을 기록했다. 성적만 담보가 되면 흥행은 보장할 수 있는 팀.
2018 시즌 부터 다시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고 있어서 팬들이 다시금 스틸야드로 돌아오는 중이다.

22.2. FA의 악연


90년 후반부터 이어진 FA삽질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선수를 사오면 삽질하고, 잘하는 선수는 빼앗기고, 슬럼프에 허덕이는 선수를 타 팀에 팔면 그 해에 포텐이 폭발'''하는 악순환의 연속. 일부 팬들은 포항의 축구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 하지만 지난해까지 포항에서 별 활약없다가 그 다음해 다른팀에서 S급 활약을 보이는 선수들을 보면 울화통이 치미는 것은 당연하다. 2009시즌 우승팀은 전북 현대의 경우 최태욱, 브라질리아, 이광재 모두 포항에서 전북으로 이적한 선수들이었으며 덤으로 이동국까지 한때 포항의 프렌차이즈였다는 걸 생각하면 2009년 전북의 우승을 보는 포항팬의 심정은 복잡 그 자체.
그리고 이는 2010년에도 이어졌다. '''1년 계약으로 사온 설기현은 K리그 1경기도 못 뛰고 부상으로 상반기 아웃'''에 팀내 불화로 팀 케미스트리 붕괴를 조장했고 모따신이라 불리던 모따를 비롯한 용병 3인방의 현재 행보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반면 성남으로 이적한 남궁도는 '''이번에도 이적한 팀에서 포텐이 터졌다'''. 이쯤되면 FA 시장에 굿이라도 해야될 판...OTL
그리고 '''2011, 12시즌도 변하지 않아서''' 야심차게 영입한 모따는 그나마 리그에서 제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마지막 플레이오프에서 '''"페널티킥 실축 + 공격수가 상대팀에게 페널티킥을 내주는"''' 승부조작급 사고를 떠뜨린 후 떠났고, 슈바는 잦은 부상으로 결장, 그나마 데릭 아사모아가 제 역할을 해주었으나 아사모아 마저 12시즌 들어서는 부상과 하락세에 12시즌에 영입한 지쿠와, 조란은 '''국내선수들에게도 밀리며''' 지쿠는 시즌 도중 강원으로 임대, 조란은 써먹지도 못하고 13시즌 시작과 함께 중국으로 임대 보내버렸다.
그래서 아예 포항이 선택한 방법이 '''"외국인 용병 없이 리그 운영"'''(...)
2013 시즌 K리그 클래식 팀 중 유일하게 용병없이 시즌을 시작했고 시즌 초반에는 모든 축구전문가들이 포항의 하락을 점쳤으나, 정작 용병을 다 빼버린 2013시즌 포항은 K리그 클래식대한축구협회 FA컵을 모두 우승하는 K리그 최초의 리그+FA컵 더블 우승을 일궈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국내선수들만 이루어진 스쿼드로 한계를 드러내며 2년 연속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외국인 용병과 외부영입 또한 꼭 필요한 상황.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구단과 프런트는 14시즌도 용병 없이 가기로 했다.
아무튼 소위 FA하고는 지독하게도 운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구단은 선수들을 키우는데 힘을 쏟는다. 그나마 이러한 유스 투자가 제대로 성과를 내면서 14시즌은 외부영입 없이 유스와 기존선수만으로 더블스쿼드 급의 전력을 구축했으나 선수들의 이름값이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선수들을 잡을 돈이 없다는 것이 포항의 문제이다.
그리고 2015 시즌. 이명주를 판 돈으로 드디어 2년만에 다시 외국인 용병 3인방(안드레 모리츠, 라자르, 티아고)을 질렀고, 그 중 모리츠는 EPL에서 이청용과 한솥밥을 먹던 선수였지만 결과는 '''사이좋게 모두 폭망''' 그나마 티아고만 자기 자리에서 평균적인 역할을 해주었을 뿐 모리츠는 K리그에 적응 실패하고 반 년만에 인도로 재임대를 보내버렸고 라자르는 공격포인트 하나 없이 시즌을 마치게 생겼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용병 좀 사자고 닦달하던 팬들 마저 우린 안 될 거야 하면서 더 이상 용병 영입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2016년 '''양동현'''을 영입하면서 팀의 원톱잔혹사와 포항의 FA잔혹사를 모두 깨버렸다
모기업이 포스코라는 이유로 구단에 돈이 많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포스코는 그냥 스폰서일 뿐이고 자금 지원도 생각 외로 쪼잔한 편이다. 일단 주주 절반이 외국인인데다 민영화는 되었으나 여전히 공기업 처럼 정부가 부려먹고 있어 함부로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 대기업인 삼성, 현대, LG와 같이 돈지랄 하기는 힘들단 소리. 결국 해마다 죽 쒀서 남 주는 험한 꼴은 다른 지방 구단과 다르지 않다.
2007 시즌 우승의 주역이던 따바레즈도 못 잡았고 2008 시즌 이후 프렌차이즈 스타로 키울 생각이었던 박원재조성환을 모조리 일본에 뺏긴 것도 모자라 러시아로 떠난 오범석의 경우는 FIFA 제소 직전까지 가는 다툼끝에 보내줬더니 돌아와서는 라이벌 팀인 울산에게 가버렸다. OTL [96][97]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도 포스코의 짠돌이 기질을 바꾸진 못했는지, 2009 시즌 이후 데닐손, 최효진은 그냥 내보내기로 했고[98] 노병준, 김형일 등 주전 선수들도 중동 클럽... 그것도 ACL 8강에서 붙었던 분요드코르에서 러브콜이 쇄도중이었으나 챔피언스 리그에서 벌어들인 상금으로 겨우 막았다...
결국 파리아스 감독도 중동의 '''오일머니로 연봉 26억! 위약금 4억 따위는 한 끼 식사일 뿐이지요 우걱우걱''' (...) 러브콜을 이기지 못하고 2009 시즌을 끝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의 알 아흘리 클럽으로 옮기게 되었다. 진짜 저 동네 기름칠은 답이 없다. 우스갯 소리로 이러한 '''FA에 적응이 되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포항의 팬'''이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2010년을 지나 2014시즌까지 진행중이다. 그나마 이러한 재정상황 속에서도 포스코가 사회공헌 차원에서 유스 투자 만큼은 줄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스 출신 선수들로 포항은 꾸준한 성적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2014시즌 연봉공개의 여파 및 K리그 전체가 경기불화의 여파로 구단들 씀씀이가 모두 줄어들자 본의 아니게 내실에 충실했던 포항이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MB정권 시절 대통령 친형(이상득)이 낙하산 사장을 포스코에 내려보낸 다음 포스코를 시원하게 말아먹어버려서(...) 졸지에 포항 스틸러스도 그 유탄을 맞고 15시즌은 30% 예산 추가 감축 확정.

22.3. 퐁당퐁당 홀짝 징크스


감독 관련해 5대 감독 박성화 시절(1996~2000)부터 정말 특이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박성화부터 역대 감독들 성적과 내용을 보면 마치 물수제비 뜨듯 퐁당퐁당 거리며 성공과 실패가 반복된다. 박성화부터 홀수 감독들은 좋은 평가를 받고, 짝수 감독은 예외없이 망했다.
징크스의 시작점인 박성화 감독은 전성기인 1990년대에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아 2000년대 이후 입문한 팬들이 그 전성기를 잘 모르고 2007년 부산 감독을 맡았다가 올림픽 대표팀으로 빠져나가버린 이후의 행적 때문에[99] 과소평가 받지만 포항에서의 박성화는 리그 우승만 없었다뿐이지 1996년 FA컵 우승, 1996-97, 1997-98 시즌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2연패를 이룩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포항의 AFC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중 2번을 만들어주어 지금 포항이 당당하게 아시아의 명문 소리를 할 수 있게 된 건 박성화 감독의 공이다.[100]
6대 감독 최순호부터 본격적인 징크스가 발휘된다. 성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우승은 못했지만 2001년과 2002년의 FA컵 준우승, 2004년 리그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 당시 최순호 감독이 구사한 심심한 수비축구에 관중이 많이 줄었고 팀컬러를 잃었다는 서포터즈의 반발도 심했다. 결정적으로 2004년 후기리그에서 꼴찌를 하면서 여론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서포터즈가 감독퇴진 플래카드를 내거는 내홍이 있었고 2004년 챔피언 결정전에서 수원에게 승부차기로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자 최순호 감독은 재계약에 실패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7대 감독은 구단 최초 외국인 감독인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이었다. 파리아스 감독은 최순호 감독 시기 실종되었던 공격축구 기조를 되찾고, 특유의 브라질색을 팀에 입혔다. 2년의 담금질을 거쳐 6강 플레이오프 제도 하에서 치뤄진 2007년 플레이메이커 따바레즈박원재, 최효진 양날개를 앞세워 리그 5위에서 경남, 울산, 수원, 성남을 모두 깨부수고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2008년부턴 완전히 꽃피운 파리아스식 공격축구로 2008년 FA컵 우승, 2009년 리그컵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최초로 감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009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은 그 당시 K리그 팬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였던 사우디의 알 이티하드 꺾고 이룩한 것이라 더욱 의의가 컸다. '''이 시기부터 특유의 빠른 패스웍에 기반한 공격축구 스타일을 정립했고 대외적으로 유스 잘키우는 구단이란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공격 축구야 그전에도 했지만 엄밀히 말해 감독 취향따라 축구 스타일도 바뀌는 팀이었다. 바르셀로나처럼 그 팀하면 생각나는 고유의 스타일이 형성된건 파리아스 부터다.
지방중소도시에서 지내는게 썩 편하지만은 않았던 파리아스 감독은 중동 오일머니의 유혹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알 아흘리로 떠나고 포항은 새로운 외인감독 레모스 올리베이라를 8대 감독으로 선임한다. 레모스 감독은 '''아름다운 축구'''라는 슬로건을 내밀며 야심차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팬들도 올해는 우승이 힘들거 같다며 마음을 너그럽게 먹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 심각했다. 일단 외인 공격수 데닐손스테보와 믿음직한 날개 최효진이 떠났고, 그들을 대체해야할 설기현모따는 각각 부상과 부진으로 한사람 몫을 못해줬다. 하지만 레모스 감독은 그런거 감안하더라도 너무 못했다. 함량미달 공격수인 알렉산드로에 대한 전폭적인 신임, AFC 예선전 치루려고 리그를 2군으로 다 채우는 기괴한 로테이션, 아무런 색깔이 전술, 공격에는 공백이 생겼어도 중원은 파리아스 시절과 거의 같음에도 전임 감독 시기의 패싱게임 실종 등등. 문제가 너무 많았다.
2009년 8-1로 이겼던 제주에 2-5로 깨지는 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포항 구단은 2010년 5월 10일 구단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하고 레모스 감독의 경질을 발표한다. 포항 팬들은 이 시절을 흑역사로 여긴다.
2010 시즌을 박창현 대행체제로 마치고 선임된 9대 감독은 전남에서의 코치 생활과 3년간의 부산 감독생활로 어느정도 지도자 경험을 쌓은 상태였던 황선홍 감독이었다. 황선홍 감독은 기존의 공격 축구에 균형을 더해 스틸타카를 완성한다. 2011년, 2012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미드필더와 수비를 정비해 중원에서의 강한 압박,[101] 공수겸장의 측면 자원, 점유율을 포기하는 대신 빠르고 세밀한 패스웍, 장신 타겟맨을 활용한 킥 앤 러쉬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이 모두 더해진 강력한 팀을 완성했다. 이를 통해 2012년 FA컵 우승, 2013년 K리그FA컵 더블이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2013년 더블은 외인 선수 없이 이뤄낸 성과라 큰 화제가 되었다.
황선홍 감독은 2015년을 마지막으로 휴식을 갖기 위해 팀을 떠났고 10대 감독으로 U-17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낸 최진철이 선임되었다. U-17에서 보여준 선수비 후역습 전술과 포항의 스틸타카가 안맞아서 걱정이 많았는데 그대로 적중했다. 이해에는 보드진의 형편없는 지원까지 더해져 팀이 하위스플릿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져 강등권과 승점 4점차까지 추락하게 되자 결국 사임을 표명했다.
최진철 감독의 후임으로 팬들은 김병수 감독을 원했지만, 최순호 감독이 다시 오더니[102] 17시즌과 18시즌 두 시즌 동안 파리아스, 황선홍 시절에 비해 부족한 경기력을 보여주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18시즌에 드디어 상위스플릿에 복귀함으로써 일단 홀짝 징크스의 구색자체는 맞춘 상태이다. 하지만 결국 2019년 시즌 초반 성적부진으로 경질 되었고, 홀짝징크스를 끝내버린다.
이후 스틸타카의 부활을 위해 파리아스 시절을 직접 선수로 경험했던 수석코치 김기동을 12대 감독으로 선임해 팀을 급하게 추스르며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22.4. 숨겨진 골키퍼 명가


아랫 동네에 가려서 그렇지만 포항은 전통적으로 골키퍼 걱정이 없는 골키퍼 명가였다. 1980년대에는 조병득, 정기동, 박철우[103]1990년대에는 드라간, 김이섭. 2000년대에는 김병지정성룡, 신화용[104]. 2010년대에는 영원히 포항일 것만 같던 신화용이 떠나자 강현무라는 걸출한 골키퍼가 등장, 훌륭히 성장하며 리그 탑급 골리가 되었다. 심지어 신화용에서 강현무로 이어지는 최근 10여년 동안은 포항 유스가 주전 키퍼 자리를 내준적이 없다. 2018 시즌에도 K리그 챌린지에서 수준급으로 활약했던 류원우가 영입되었지만 역시 유스 출신 키퍼인 강현무에 밀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22.5. 스틸러스와 스틸야드


1985년 구단명을 '''포항제철 아톰즈'''로 변경하며 1996년까지 데즈카 오사무철완 아톰 캐릭터를 저작권료도 지불하지 않고 무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도 않았고[105]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기 때문에 포항제철에서는 별 생각 없이 강철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아톰을 마스코트로 삼고 팀명까지 아톰즈로 유지했던 것이다.
이후 국민들의 저작권 개념이 잡힐 적에야 뒤늦게 문제제기가 되었고, 구단 측이 팀명 공모전을 열어 1997년 팀명을 바꾸게 된다. 새 팀명은 '''포항 서포터즈 클럽이 쓰고 있던 '스틸러스'라는 명칭을 그대로 넘겨받아 포항 스틸러스가 되었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구단에서 서포터즈 클럽의 '스틸러스'라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 쓰면서 두 명칭이 혼동되자, 당시 서포터즈 클럽은 '마린스'라는 이름으로 명칭 변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틸야드'라는 이름 또한 팬들이 부르던 애칭에서 출발했다.''' 개장 당시 이름은 포항축구전용구장이었는데 팬들 사이에서 스틸야드로 불리다가[106] 2006년 공식적으로 구장 이름을 스틸야드로 개명했다.
결국에는 '''스틸야드, 그리고 스틸러스. 이 두 가지 명칭 모두가 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름'''인 것이다.

22.6. 블레즈(BLEDS)


지방 구단인지라 얼마 없는 TV 중계도 잘 안 되는데 이 처사에 열받은 한 서포터가 스틸러스 TV라는 인터넷 중계 방송국을 개국했다. 이제는 구단에서도 은근히 공식 중계 팀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링크). 빅 매치일 때는 방송 채널을 4개 이상 돌리는데도 언제나 꽉 찬 방이다. 흠좀무.
여러모로 공중파 중계에서 K리그 팬으로서는 포항과 붙은 자신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이 방송을 찾아오기도 하지만, '''"원래 취지는 어디까지나 포항 스틸러스를 위한 방송국"'''이므로 편파 해설은 당연히 각오해야 한다. 타 팀 팬이 중계를 듣고 있으면 노골적인 편파 해설로 인해 정신이 멍해질 것이다.
그나마 2009 시즌 후반부터는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선전과 포항 스틸러스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케이블 스포츠 채널을 중심으로 중계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2010 시즌부터는 구단 자체 중계 명칭을 스틸러스 TV로 정하면서 자연스레 개명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결국 2010년 4월 BLEDS로 개명했다. 이름의 유래는 당연히 '''BLACK+RED+LED'''. 그렇게 근근히 중계를 해 오다가 2012 시즌부터 '''골 많이 나고 재미있는 포항 경기를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중계를 하자''' 블레즈에서 중계를 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SPOTV나 중계가 없을 때는 블레즈에서 자체 편성하여 중계를 하고 있으며, 중계시에는 경고 누적이나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선수 or 유망주들을 객원 해설로 초대하여 중계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23. 여담


  • 2009년 클럽 월드컵에서 사베야에스투디안테스를 이끌고 포항과 맞붙게 되었는데 경기 직전 인터뷰에서 포항에 대한 온갖 칭찬으로 인터뷰를 도배했다. 물론 립서비스성 발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엄청난 극찬이었다. #
  • 그리스 사람이 안다(...). 대체 어찌 아는 건지... 저 외국인은 북한남한도 구분 못 한다. 2010년 방송본인걸로 봐서는, 아마도 2009년 FIFA 클럽 월드컵 3위의 영향으로 보인다.
  • 2017년 4월에 기념 교통카드를 출시했는데, 뜬금없이 티머니가 아닌 캐시비로 내놓았다. 그것도 L.포인트가 달린 단일권종형이다. 10가지 도안으로 나왔고 가격은 1장당 3,000원이며, 스틸러스 샵에서 판매 중이다. 비회원도 주문 가능.
  • 개그맨 황영조가 포항빠이다. 그의 영향으로 개그우먼 허민도 포항빠가 되었다고 한다.
  • K3리그경주시민축구단과 MOU를 맺어 경주시민축구단을 위성 구단으로 삼았으며,[107] 송라클럽하우스에서 연습 경기를 갖거나 서로 선수를 주고받는 등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2018년 여름 경주에서 뛰던 김지민이 포항으로 이적해 맹활약하면서 순기능을 만들어내고 있다. 2020년에는 지난 시즌 경주의 감독이던 김대건 감독이 포항의 코치로 부임하기도 하였다.
  • 광주 FC에게 상대전적 15전 10승 5무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인지 광주 FC가 승격한 2020시즌 인터뷰에서 1부리그에서 꼭 이기고 싶은 상대로 박진섭 감독과 팀의 주장 여름 선수 둘 다 포항 스틸러스를 지목하였다.# 첫 승을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는 듯.
  • 의외로 부산한테는 약한모습이다. 아니 고전하거나 졸전하는 경우가 많다. 전신 대우 로얄즈 시절 포항을 많이 때려 잡은 면도 있었지만 더블을 달성한 13년도에도 부산에 패하며 부산에 상위스플릿 진출을 스틸야드에서 지켜봐야만 했고 부산이 강등됬던 15년도에도 덜미를 한번 잡힌 적이 있을 정도이다. 이후 2020년 K리그 17라운드 원정경기에서 2:1로 패하였다. 더욱 안습인 것은 통산 상대전적도 56승 47무 50패로 열세일 정도로 이상하게 부산에게는 고전하는 면이 있다.
  • 2020년 5월 10일 부산과의 리그 홈 개막전이 2대0 승리와는 별개로 화제가 되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무관중 경기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응원 효과음을 사용한 것 때문이다. 다른 몇몇 구장에서도 응원 효과음을 사용하긴 하였으나, 포항은 차원이 다른 준비성으로 실제로 관중들이 있는 듯한 느낌을 잘 구현했다는 평가이다. 실제로 경기 후 여러 매체에서 담당자 인터뷰를 통해 많이 기사화 하였으며, MBC 뉴스데스크 스포츠뉴스에도 방영되었다.#


2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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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포항 스틸러스가 있게 한 영웅 중 한 명이자 열렬한 후원자.''' 포항 서포터가 흔드는 깃발에 머플러를 한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박태준 회장이다. 아울러 포항스틸야드 E석의 별칭인 '청암존'의 청암 또한 박태준 회장의 호다.[2] 포스코와 그 협력업체 2개사가 컨소시엄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3] 모기업의 연고와 같이 실업축구단 창단 당시부터 포항을 기반으로 활동하였고 K리그에서 광역연고제를 시행했던 1987~1989 시즌을 제외하고는 연고지가 변경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당시 광역연고지도 포항시를 기준으로 확대된 대구/경북이었고, 심지어 1987 시즌에만 대구시민운동장을 사용했을 뿐 1988 시즌 부터는 모든 홈 경기를 포항에서 치렀다.[4] 광역연고(대구/경북) 초창기인 1987년 한 시즌동안 홈 구장으로 사용.[5] 공식적으로 연고가 확립된 것이 87년이고, 실업축구단 시절에도 경기시에 주로 사용.[6] 2002 시즌이 끝나고 잔디 교체 등 대대적인 구장 보수공사에 들어가 2003년 7월 5일에 재오픈했다. 이 기간동안 사용.[7] 스틸야드 잔디 보수공사로 스플릿 기간에 사용[8] 전남 드래곤즈 창단 이전에 제2 홈구장으로 사용[9] 디아이에프코리아를 통한 푸마 코리아 계약[10] 2020년 새롭게 개설된 유튜브 채널로 여러가지 오리지널 컨텐츠들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11] 포항항TV 개설 이전까지 메인으로 운영되던 유튜브 채널로 하이라이트, 골영상 등을 업로드하는 서브 채널로 활용될 예정이라고 한다.[12] 초기에는 포철공고가 축구부를 운영했으나 2011년에 포철공고가 마이스터고로 지정되면서 2012년 말까지 모든 운동부를 폐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2012년을 끝으로 포항공고 야구부와 더불어 포항 유스 팀 기능은 포항제철고등학교로 모두 이관되었다.[13] 포철동초(육성반)/포철서초(보급반)의 시스템으로 운영하였으나 2017년 두 학교가 통합되었다.[14] 전신인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 횟수 포함.[15] 포항 소속 기준 / 스틸야드넷 참고.[16] 세미프로까지 포함한다면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17] 프로팀으로써 역사가 가장 긴 팀은 원년부터 프로로 참여한 제주 유나이티드이다.[18] K리그에서는 FC 서울과 함께 1980년대, 90년대, 00년대, 10년대 모두 우승을 경험한 유이한 구단이다. 국내 다른 프로스포츠 구단에서는 KBO 리그KIA 타이거즈두산 베어스가 이 기록을 갖고 있다.[19] 리그와 마찬가지로 FA컵에서도 90년대, 00년대, 10년대 모두 우승을 경험했고, 이 기록은 FA컵에 참가하는 모든 대한민국 축구팀 중 유일하다.[20] 전신대회인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포함[21] 원년팀 중 할렐루야, 국민은행은 해체, 대우 로얄즈는 2015 시즌 강등-2020 시즌 K리그1 복귀-2021 시즌 강등, 유공 코끼리는 2019 시즌 강등-2021 시즌 K리그1 복귀[22] 우승은 UEFA 챔피언 바르셀로나, 준우승은 CONMEBOL 챔피언 에스투디안테스[23] 더욱이 국내 선수로만 달성한 진기록이기도 하다.[24] 완공 뒤 포항시에 기증 영구 무상임대 형식을 취하고 있다.[25] 1980년대 부터 이미 여러 중·고·대학교와 협약을 맺는 등 유소년 시스템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공식적으로 2003년 산하 유소년 팀 운영을 체계화했다.[26] 당시 법인명은 (주)포항프로축구였으며 2003년에 현재의 법인명으로 개칭했다.[27]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스포츠단이 자체적으로 명예의 전당을 만든 것은 최초이다.[28] 알 힐랄과 같이 최다우승이다.[29] 유일하게 스틸야드에서 들어올린 우승컵이다[30] 포항 소속 선수의 수상 기록[31] 상무 전역 전 기록(16경기 5도움) 포함[32] 3위 이하 감독 최초 감독상 수상[33] 최다 득점이 4골 미만일 경우 시상하지 않음.[34] 현재까지도 FIFA 클럽 월드컵 한 대회 역대 최다 득점. 2009년 당시 리오넬 메시를 이긴 대 기록이자, 3위 팀에서 득점왕이 나온 전무후무한 기록임.[35] 공식적으로는 2003년부터 유스팀으로서의 체계가 완비됐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포항의 유스팀 기능을 해 왔으며 실질적인 시작은 1980년대로 올라간다.[36] 2011년에 포철공고가 마이스터고로 지정되면서 2012년 말까지 모든 운동부를 폐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2012년을 끝으로 포항공고 야구부와 더불어 포항 유스 팀 기능은 포항제철고등학교로 모두 이관되었다.[37] 2017년 두 학교가 통합되었다.효곡동 지역의 인구 감소 영향이 큰 것으로 파악된다.[38] 1974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1975 전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1981 후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1982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39] 1986 축구대제전, 1986 후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40] 구단 최초의 선수 출신 감독.[41] 1988 한국프로축구대회, 1988 후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1992 한국프로축구대회 우승.[42] 이회택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소집된 동안 감독대행으로 선임되어 팀을 지휘했다.[43] 1993 아디다스컵 우승.[44] 허정무 감독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소집된 동안 감독대행으로 선임되어 팀을 지휘했다.[45] 구단 선수 출신 감독.[46] 1996 FA컵 축구대회, 1996-97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7-98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47] 구단 선수 출신 감독.[48] 구단 최초의 외국인 감독.[49] 2007 삼성 하우젠 K-리그, 2008 하나은행 FA CUP 전국축구선수권대회, 2009 피스컵 코리아, 2009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50] 2010 포르티스 보험회사 호랑이 구정컵 우승.[51] 구단 선수 출신 감독대행.[52] 구단 선수 출신 감독.[53] 2012 하나은행 FA CUP, 2013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3 하나은행 FA CUP 우승.[54] 구단 선수 출신 감독.[55] 롯데 자이언츠의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SK 와이번스의 '연안부두'와 비슷한 포지션의 노래다.[56] 이때는 전후기 리그 제도라 성적을 따로 계산했기에 전체 꼴찌는 아니었다. 2004년 후기 리그만 꼴찌였는데 전기리그에 벌어놓은게 있어 플레이오프에 나갈수 있었고 수원과 승부차기까지간 끝에 준우승했다. 포항의 추락이 워낙 커서 그렇지 전기리그에 잘한 팀이 후기리그에 퍼진다는 문제점은 전후기리그 시행되는 내내 지적되던 문제점이다. 초호화 멤버를 자랑했던 성남 일화조차 전후기리그로 치뤄진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6시즌 전기리그 우승 이후 후기리그에서 힘 빠진게 눈에 보여서 말이 많았다.[57] 쓸때없이 백패스하거나 빌드업 과정에서도 백패스를 한 선수는 바로 교체 되었을 정도[58] 원정은 무승부가 목표. 앞서고 있는 경기는 후반에 무조건 수비수 교체하고 잠그기[59] 황선홍 감독 본인부터 부산 시절 정성훈, 포항와선 배천석, 박성호 등 매시즌 장신 타겟 스트라이커를 한명 이상은 기용했다. 2011년에는 슈바를 쓰긴 했지만 제대로 된 활약을 못해 플레이오프에서 제대로 피를 봤다.[60] 유럽에도 바르셀로나처럼 팀 컬러가 확연해서 그거 거스르면 수뇌부가 알아서 컷하는 팀이있고 첼시인테르처럼 감독이랑 선수들이 당시 환경에 따라 알아서 하는 팀이 있는데, K리그에선 전자가 드문 편이다. 니포 축구K리그에 센세이션을 불러왔던 부천 SK는 모기업의 무관심속에 제주로 연고이전하는 와중에 니폼니시 시절 쌓아둔 자원까지 날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했고, 서울은 딱 감독이랑 선수들이 알아서 하는 유형이라 감독 바뀌면 스타일도 바뀐다. 최강희 감독 이래 닥공축구라는 특유의 스타일을 구축한 전북은 2016년 이후 명문이 아니라 K리그 최악의 수치가 되었다.[61] 2007년 포항 우승 이후 포항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62] 1993년 이전에도 경북지역의 여러 중·고·대학교와 협약을 맺어 유소년 시스템의 골격을 갖추기도 했다. 이것이 전면적으로 개편된 것이 1993년이다.[63] 초대 감독인 한홍기 감독이 김병수가 중학생일 때부터 애지중지 키워왔다. 심지어 1군 선수단 훈련에도 참가시켰을 정도.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시스템을 생각하면 꽤나 파격적인 교육이었다.[64] 이때 유소년 시스템에 투자해 둔 것이 신의한수[65] 이는 모기업의 사업 영역과도 연관되는데, 알다시피 포스코의 주력사업은 철강제조업으로 B2B#s-2를 위주로 한다. 따라서 축구단 운영으로 인해 얻는 가장 큰 이익인 홍보효과에 대해 별달리 큰 영향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66] 그러나 드래프트 제도에도 맹점이 있는 것이, 유스출신 선수 우선지명이 4명뿐인지라 그 4명을 빼면 다른 팀에 뺏기기 때문이다.[67] 한국의 프로축구단에서는 한국 특유의 학원축구 시스템과 관련 규정으로 인해, 구단측이 유소년 선수와 프로 계약을 체결하여 선수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68] 두 도시 모두 영남을 대표하는 공업 도시인데다, 포항 포스코에서 생산된 철강제품은 울산의 현대자동차 및 중공업에 쓰이는데, 현대가 당진에 제철소를 마련하기 전에는 포스코에서 부르는데로 원자재인 강판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69] 이 경기에서 눈부신 선방을 기록한 김병지는 이후 포항으로 소속을 옮겨 2004년 결승전에 포항 소속으로 출전했지만 승부차기를 실축함으로서 한 번 더 포항에 준우승을 남겼다. [70] 바로 직전 경기인 부산vs 윤성효부산김신욱하피냐를 경고누적으로 최종전 출장 불가로 묶어버린 데다가, 후반 44분에 역전골을 넣고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최종전에서 포항이 순위를 뒤집을 수 있게 되었다. 경기후 포항 페북에 효멘의 포항 선수시절 사진을 올라왔을 정도로 포항팬들에게 찬양을 받은 사건.[71] 울산종합운동장에 있는게 진품 트로피였다. 전주에 있는건 모조품이였으며 2019년 12월 2일 전북은 진품 트로피를 받았다.[72] 정원진의 경우 이석현과의 트레이드로 이적했다.[73] 틀린 말은 아닌 게 연고제 도입 당시 포항제철의 홈구장은 대구시민운동장이었다.[74] 광역연고제에 대해 모를리 없는 서울팬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라기보단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호도에 앞장섰던 김현회나 타팀팬덤이 서울 연고 부정할때 이 광역연고제 시절을 걸고 넘어지곤 했기 때문이다.[75] 수원이 축구 수도라는 별명이 붙은건 리그 참가 초기부터 우승을 계속하고 이로인해 관중 동원력이 한동안 K리그 탑을 유지하며 다른팀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대회의 우승 트로피를 합치면 수원이 K리그 팀들 중에서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76] 포항에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프로야구단이 삼성 라이온즈이기 때문에 포항 야구팬들 대부분은 삼성라이온즈 팬이다. 반대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 팬덤은 야구에 매우 적대적인데다 설령 야구에 마음을 연다 하더라도 가까운 팀이 kt 위즈다 보니 삼성 라이온즈 팬덤과 사이가 좋지는 않다.[77] 2016년 우승-2017~2018년 4강, 2019년 우승[78] 참고로 2019년 FA컵 우승하기 전까지는 두 팀 모두 FA컵 최다우승 타이기록(4회)을 가지고 있었지만 2019년 수원의 우승으로 수원이 FA컵 5회 우승을 기록하면서 포항은 최다우승 기록을 뺏기게 된다.[79] 2016년과 2017년에는 K리그 2에 있던 부천 FC 1995부산 아이파크에게 패배했고, 2018년에는 그 해 K리그 2로 강등된 전남 드래곤즈에게 패배했다.[80] 또한 32강에서 포항을 이긴 이 4팀은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뒀는데 부천은 4강, 부산은 준우승, 전남은 4강, 수원은 우승을 기록했다.[81] 이날 황선홍이 발리슛을 골로 연결시킨 뒤 스틸야드 철망을 붙잡고 격렬하게 골 세레머니를 했는데 이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이 꽤 많다. 그리고 2012년 FA컵에서 우승한 뒤 이 세레머니를 재현했다.[82] 심지어는 2군 내보내고도 포항이 이긴 경기가 있을 정도(...) 오죽하면 성남시민운동장을 문수경기장에 이은 포항 제 3의 홈구장이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83] 전남은 포스코 광양 제철소[84] 회사 생활에서 옆 팀과 실적을 비교 당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85] 과거 대구의 알파벳이 현재의 DAEGU가 아닌 TAEGU였다[86] 대표적으로 박주영을 배출한 청구고[87] 포항 서포터즈 그룹 중 대구를 기반으로 하는 '''엇따대구'''라는 서포터즈 그룹도 존재하는 상황이다.[88] 물론 같은 대경권에 다른 군인 팀이 있긴 하지만 여긴 팀의 특수성이랑 연고지의 한계 때문에 아직 갈 길이 멀다.[89] 실업축구단 당시 별도의 축구단 엠블럼은 없었고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의 회사 CI를 함께 사용하였다.[90] 당시 유니폼에는 엠블럼이 부착되지 않았었고 연습복이나 트레이닝에 원형의 엠블럼이 부착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방패모양의 아래 엠블럼이 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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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유니폼에는 주로 영문으로 된 엠블럼이 부착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아래의 한글로 된 엠블럼이 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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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아스날, 맨유 등등 1800년대 후반 ~ 1900년대 초반에 창설된 대부분의 축구 팀은 그 지역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거나 노동자들을 위한 축구 클럽에서 시작되었다.[93] 이 때문에 포스코에서는 자사의 협력 업체들한테까지 포항 스틸러스의 티켓을 많이 뿌리는 편이다. 야빠와 안티 국축 팬들은 이를 공짜 표라며 헐뜯지만 '''기업의 지역 사회 환원''' 취지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야 할 부분. 그리고 이렇게 자사와 계열사에 표를 뿌리는 건, 야구나 기타 스포츠 모두 마찬가지이다. 제철소 노동자들에게는 아예 복지 카드에서 차감하는 형식으로 제공한다.[94] 이때는 포항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쓰고 있었다.[95] 포항역-양학동역(이 운행 계통이 없어지면서 같이 폐역되었다)-효자역(방향 변경)-괴동역 통과-제철역 순으로 운행했다. 원래 포스코 직원용이었으나 포항 스틸러스의 홈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폐지되었다.[96] 그리고 오범석을 보내기로 약속했던 성남과는 계약 위반에 걸려 결국 정성룡 을 헐값에 넘긴다.[97] 게다가 오범석은 J리그로 임대전에 해외에 나가겠다고 투정을 부리며 팀내 불화를 일으켰고 그 때문에 파리아스 감독은 사전준비 차원에서 인천에서 최효진을 데려왔다. 최효진의 이적이 성공적이라고 판단되자 오범석을 냅다 J리그로 임대 보내버렸다. 사실 오범석은 친정팀인 포항보다 고향팀인 울산을 더 좋아하니 포항팬들에게는 패륜소리를 듣고 있다. 단물만 빼먹으려 포항에 입단한거 아니냐는 소리까지...[98] 이 두 명은 돈 보다 개인 사정이 더 크긴 하지만...[99] 2008년 올림픽 당시 축구장 물채워라 말이 나오게 한걸로 유명한데 이탈리아에 지고, 카메룬과 비기고, 온두라스에 승리한건 그냥 이길팀한테 이기고, 질팀한테 지고, 비길팀한테 비긴것일 뿐 이다. 그전에 맡았던 청소년 대표팀도 마찬가지. 2002 세대와 축협의 유스투자가 맞물려 성과가 나기 시작한건 2010년대 이후의 일이다.(2012세대가 그 첫세대이다.)[100] 준우승도 꽤 많이 했는데 1996년 아디다스컵 준우승, 1997년 프로스펙스컵,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 1998년 아시아 슈퍼컵 준우승을 했다.[101] 젠틀한 이미지와 달리 황선홍 축구는 거칠고 파울도 많이 나오는 편이다. 물론 닥공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빈공간 메운다고 거친 파울 쏟아내고 그와 비례해 판정시비도 쏟아낸 전북 수준은 아니지만. 반대로 파울이 적었던 감독은 황선홍, 최강희보다 경기 템포를 느리게 가져가는 최용수.[102] 포항 역사상 최초로 홀짝 순번을 모두 체험하게 된다.[103] 동시대 최인영에게 가려진 선수였지만 미국 월드컵까지 부동의 국가대표 넘버2 골키퍼였다.[104] 심지어 정성룡과 신화용은 활동 시기가 아예 겹쳐서 키퍼 로테이션을 돌았다.[105]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은 1998년 부터 시행되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어린이들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아톰이 일본 만화 캐릭터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106] CM 01-02(한국 발매명:CM 2002)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미 해외에서도 스틸야드라고 불리던 상황.[107] 실제로 경주시포항시는 바로 이웃하고 있어 지리적으로도 가깝다.